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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전라도 이야기] 수리계원이 세운 공적비

     

    2020년 03월 24일(화) 10:18
    현석 노길동 공적비. 용두수리계 계원들이 1995년에 세웠다. 농사에 큰 보탬이 되도록 수리계에 도움을 주어 그 공을 잊지 않고자 세운 것이다.

    [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전라도 이야기] 수리계원이 세운 공적비

    지금은 사라진 수리계(修理契), 수리계원이 세운 공적비로 말하다

    글‧사진 김덕진 광주교육대 교수

    ■ 쌀이 주식인 우리의 음식문화

    지난 호에서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비를 소개할 때에 소작쟁의를 설명한 바 있다. 소작쟁의란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쌀 때문에 비롯되었다. 지주는 쌀을 많이 가져가려 하고 소작인은 적정선만 내려는 ‘밀당’이었던 것이다. 요즘의 임금 협상에 비교된다.
    우리 민족의 주식은 쌀이다. 그래서 곡물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이 쌀이다. 조선후기의 경우 쌀값은 보리쌀값의 배 가까이나 되었다. 그리고 벼를 쌀로 도정하는 것이 보리를 보리쌀로 도정하는 것보다 노동량이 덜 들었다. 당연히 농민들은 쌀농사를 중요시 여겼고, 논을 늘리기 위해 밭을 논으로 바꾸는 작업을 최근까지 펼쳤다.

    ■ 자연이 순순히 도와주지 않은 쌀농사

    그런데 우리의 쌀농사는 기후와 토질·지형에 비춰볼 때 기본적으로 두 가지 난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모내기 전후에 비가 흡족하게 와서 논에 물이 가득 차야 하는데 하늘이 그렇게 해주는 때가 잦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비가와도 빗물이 고이거나 흐르지 않고 땅 속으로 금방 스며들어가 사라져버리고, 설령 냇물이 흘러도 내가 논보다 낮은 곳에 있어 물을 위로 끌어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모판에 애써 모를 길러 놓고도 물이 없어 모내기를 못하고 말라 죽은 모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때늦게 메밀을 심는 때가 잦았다. 그 결과는 그 다음 해 봄에 기근으로 연결되어 많은 사람을 죽음과 질병 및 이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어떤 때는 대기근을 맞아 국가 전체가 휘청거린 적도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IMF같은 금융위기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 난제를 극복하는 길은 수리시설을 갖추는 것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수리시설을 갖추는 일이다. 수리시설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내에 냇물을 가로질러 둑을 쌓아 보(洑)를 막고 냇물을 옆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광주천에 있었던 조탄보(棗灘洑)와 정읍천에 있었던 만석보(萬石洑)가 그것이다. 만석보는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을 제공하였던 것으로 이미 이름 나 있다. 또 하나는 제(堤)나 방축(防築)이라 하여 골짜기에 냇물을 가로질러 높은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다. 광주에 있었던 경양방죽과 김제에 있었던 벽골제(碧骨堤)가 그것이다. 경양방죽은 구시청 공사 때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국가경제에서 수리시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예산을 지원하거나 근태 관리에게 상벌을 내리는 등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정부도 자신들의 수리시설을 파악하여 읍지같은 곳에 기록으로 남겼는데, 광주의 경우 18세기 광주목지 제언 조항에 경양제 등 46개의 제, 조탄보 등 13개의 보가 기록되어 있다.

    ■ 수리계(水利契)를 두어 수리시설을 공동 관리하다.

    그러면 농사짓는 당사자들은 그러한 수리시설을 어떻게 구축하고 관리하였을까? 오늘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수시시설의 신축은 보통 자산가가 거금을 내놓거나 아니면 갹출을 하여, 몽리(蒙利, 물을 공급받는 곳) 단위나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리시설을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감고(監考)나 수감(水監) 등의 책임자를 두었다.
    또한 그들은 보계(洑契)나 제언계(堤堰契) 및 수리계(水利契) 등의 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광주천에 있던 조탄보의 경우 19세기 끝자락에 보계를 두었는데,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20~25인이 돈을 약간 내어 토지를 구입하고 그를 입대한 수입으로 제방 수축비에 충당했고, 보감(洑監)과 보계장(洑契長) 각 1인을 계원 호선에 의해 두고서 업무를 보게 했다.

    ■ 수리계의 조직과 운영에 공을 세운 분에게 공적비를 세우다.

    수리시설을 만들고 수리계를 운영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앞장서서 관과 접촉하여 허락을 받고, 목돈을 내놓아 기초를 다졌다. 무엇보다 의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로 뭉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일이 완성되면 계원(契員)들은 앞장섰던 분에 대한 공을 잊지 않고 공적비를 세웠다.
    광주 서창에 가면, 3기의 수리계 공적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前邑長?菴張公安燮紀蹟碑”이다. 송정읍장을 지낸 묵암 장안섭의 공적을 기록한 비이다. 장안섭은 1924~36 송정면장을, 1937년에 읍으로 승격된 송정읍의 읍장을 역임하였다. 세운 사람은 ‘洞荷水利契員 一同’이다. ‘동하수리계’의 계원들이 세웠다. 시기는 ‘??十四年 十月二十一日’이다. ‘??’은 원래 있는데 누군가 일부러 쪼아서 지웠는데, 일본 연호인 ‘昭和’로 보인다. 그러면 ‘소화14년’은 1939년이다. 내용은 ‘田高水底’, 논은 높고 물은 낮아 농사 짓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惟玄張公杜鐵功蹟碑”이다. 유현 장두철의 공적을 알린 비이다. 세운 사람은 ‘白馬水利契 契員 代表 洞荷 張敏煥 馬山 鄭海月 細洞 金鍾晥’이다. ‘백마수리계’의 각 마을 대표인 장민환(동하), 정해월(세동), 김종환(세동)이 세웠다. 뒤에는 ‘백마수리계원 일동’으로 적혀 있다. 시기는 ‘檀紀四三0一年 三月’이다. 단기 4301년은 1968년이다. 내용은 ‘당신의 의지 그것은 오직 우리를 위한 진리에의 충성이었고, 이 고장의 여명이었다. 산이 그 앞에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당신은 놓지 않고 그 많은 ?穰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이다. 풍년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글은 김일수(金馹洙)가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로 유명한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이 썼다.
    마지막으로 “玄石盧吉童功績碑”이다. 세운 사람은 ‘龍頭水利契 設立推進委員會 委員長 朱夏林’이다. ‘용두수리계’ 설립의 추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주하림이 세웠다. 뒤에는 계원들 명단이 새겨져 있다. 시기는 1995년 4월이다. 내용은 양수장 매입 때 농협에 진 부채를 상환해주었다는 것이다.

    ■ 지금은 사라진 수리계, 공적비만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을 통해 서창 일원에 ‘동하수리계’, ‘백마수리계’, ‘용두수리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찾아보면 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물길마다 골짜기마다 있었던 생계형의 소형 수리계도 일제 때 수탈을 위해 일본인이 조직한 경영형의 대형 수리조합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토지개량조합과 농지개량조합을 거처 현재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일괄 관리하고 있어 오늘날 수리계는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작은 부자’ 또는 ‘동네 부자’는 없고, ‘큰 부자’ 또는 ‘서울 부자’만 있다. 그들이 서민들, 지방 사람들 마음을 얼마나 알려나?
     

    김덕진 교수 .전대 사범대학 국사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졸업 .현 광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현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현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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