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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의 현대사-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

    사람들이 “에이~ 설마”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얘기로 들을 때 많이 쓴다. 문제는 이 ‘설마’의 사연이 거짓이 아닌 사실(事實·fact)이라는 점이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한국 현대사에서는 이 ‘설마’가 명백한 사실인 경우가 많고, 그 사실이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알려진 사례가 많다. 그래서 ‘설마’의 현대사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한국전쟁의 비극을 잘 그린 영화 중에 ‘고지전’이 있다. 이 영화의 끝 무렵에 이런 장면이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들은 부대원들이 개울가에서 씻고 있던 도중 북한군과 만난다. 그러나 이미 협정 체결 소식을 들은 남북의 병사들은 잠시 긴장했으나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고 손을 흔들며 헤어진다. 부대에 돌아온 부대원들에게 다시 고지 점령의 명령이 내려지고, 결국 영화는 한 명의 주인공만 남고 모두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진짜 저랬어? 왜 저런 미친 짓을?”이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물음에는 “에이~ 설마” 하는 뜻이 담겼으나 실제로 그랬다. 휴전 협정은 오전 10시에 체결됐으나 그 효력은 22시부터 발효됐다. 남북(유엔군과 중국군을 포함)은 모든 화력을 1953년 7월 27일 21시 59분까지 고지전에 쏟아부었고, 1953년 7월 27일 22시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전방 고지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 12시간 동안 쓰러진 병사들 중에는 아직도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시신들이 있으며, 그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 미친 ‘설마’가 현실이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신월리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 파병을 앞둔 제14연대 병사들이 파병 거부를 외치며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일주일 뒤인 10월 27일 정부군이 여수를 장악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봉기했던 제14연대 주력은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혹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른바 ‘부역자’들을 처벌한다며 수많은 ‘설마’의 학살이 저질러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이기에 민간 법정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당시 군법회의에서 적용된 법률인 국방경비법도 최소한의 법적 요건조차 갖춰지지 않은 ‘유령법’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공고되지 않은 이 ‘유령법’이 실정법보다 무시무시했다. 수십 또는 수백 명을 불과 몇 십 분 만에 판결한 뒤 처벌했다.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은 주민들은 무엇 때문에 군사재판을 받는지 이유도 모른 채 처벌됐다. 그나마 군법회의에 기소된 것은 나은 편이다. 문제는 군경에 의해 즉결심판된 주민들이다.


    해마다 봄이면 산수유꽃이 노랗게 물들이고 가을이면 그 열매로 붉게 물들이는 곳이 지리산 자락의 구례 산동면이다. 산수유와 온천 등으로 널리 알려진 산동에는 ‘산동애가’라는 노래가 전해진다. 학살의 피해를 입은 집안에서 남아 있던 막내 오라비를 대신해 죽어간 열아홉 백순례의 슬픈 사연을 담은 노래가 ‘산동애가’다. 이 노래의 사연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들은 “에이~ 설마” 하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이 사연은 한 가족이 아닌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에게는 공통의 사연이다. 그보다 더한 ‘설마’의 얘기가 넘치도록 많이 전해진다.

    최근 ‘설마’의 현대사를 제대로 밝혀내고 보다 나은 내일로 나기기 위해 각종 특볍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4·3사건과 진실위원회는 연장되거나 두 번째 시도이지만, 그 외 다른 위원회는 새로 만들어진 기구이다. ‘설마’의 현대사로 인해 수십 년 동안 피울음을 삼키며 그 ‘설마’의 사연을 가슴에 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뭔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발 위원회의 활동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기회를 놓친다고 ‘설마’의 현대사가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며, 묵혀 둔 ‘역사의 빚’은 언젠가는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하며 되살아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역사가 주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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