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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5월 역사 생생한 기록화로 밝히려고 직접 붓 들었죠”

     

     

    등록 :2020-07-02 18:58 / 수정 :2020-07-03 02:38

     

    [짬]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6개월간에 걸쳐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 ‘최후의 항전’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6개월간에 걸쳐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 ‘최후의 항전’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1980년 5월27일 아침 한무리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 계엄군에 끌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 뒤로 손이 묶인 사람들은 이날 새벽까지 민주사회와 대동세상을 꿈꾸며 끝까지 신군부에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총부리를 겨눈 계엄군의 강압적인 연행에 반항도 하지 못하고 연행됐지만 7년 뒤 6월항쟁으로 민주사회를 만날 수 있었다. 2일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의 한 화실에서 만난 김상집(65)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한창 40년 전 항쟁 모습을 화폭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는 “항쟁 마지막 날 잡혔을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뛰며 무서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일고 시절 전국 첫 고교생 반유신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된 뒤 노동운동을 하던 윤상원 열사를 만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5월1일 군복무를 마치고 전남방직에서 일하던 중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친형 김상윤(73·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씨가 예비검속됐다는 소식을 듣고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형에 이어 녹두서점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등에서 투사회보 출판, 화염병 제작, 상황일지 작성 등을 하며 항쟁지도부로 활동했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광주가 함락됐을 때 마지막까지 녹두서점에 남아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투사 회보, 제작도구 등을 숨겼다.

     

     

    그는 “도청이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물품을 숨기고 있는데 갑자기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굴비처럼 줄줄 묶여 끌려가는데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계엄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1998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5월27일 아침 김상집(붉은 원)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포승줄에 묶인 채 계엄군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김상집 이사장 제공

     

    1980년 5월27일 아침 김상집(붉은 원)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포승줄에 묶인 채 계엄군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김상집 이사장 제공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까진 기나긴 투쟁의 연속이었다. 김 이사장은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에 동료들의 명예회복을 꼭 하고 싶었다. 다행히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등이 만들어지며 폭도로 몰렸던 광주시민들이 민주화 열사로 인정받았다.

     

     

    김 이사장은 2년 전부터 5·18 중요장면을 기록화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수많은 책과 영화, 미술 작품에서 5·18이 다뤄졌지만 자신이 느낀 항쟁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형과 함께 광주 항쟁 지도부 활동

     

    2년 전부터 5·18 중요장면 기록화로

     

    색감 표현 위해 유화도 따로 배워

     

    시민군 최후항전 결의 장면 화폭에

     

    계엄군 교전하는 시민군 15명 모습도

     

     

    ‘윤상원 평전’도 곧 마무리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15년 동안 서예를 하고, 한국화를 그려서 붓과 친합니다. 보수세력의 5·18 왜곡도 있지만 광주시민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당시 사진이나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록화로 생생한 현장을 전하고 싶었죠.”

     

     

    2018년 첫 작품인 ‘결사항전’을 제작했다. 색감을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해 유화를 다시 배웠다. 이 작품은 1980년 5월26일 오후 6시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계엄군 진입 통보를 받고 시민군 지도부가 마지막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던 모습을 재구성했다. 윤상원, 윤석루 기동타격대장과 윤강옥 기획위원, 박남선 상황실장, 이양현 기획위원, 정상용 민주투쟁위 위원장,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 위원장 등 회의 참석자 모두를 화폭에 담았다.

     

     

    올해 5월 광주 금호갤러리에서는 5·18 기간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 민원실건물 2층 회의실 상황을 표현한 ‘최후의 항전’을 선보였다. 총에 맞아 쓰러진 윤상원 열사와 이를 부축하고 있는 이양현 기획위원, 김영철 기획실장을 그림 중심에 두고 계엄군과 교전하고 있는 15명의 모습을 담았다. 불이 켜져 있는 회의실이 계엄군의 표적이 되자 전등 스위치를 찾지 못한 윤석루 기동타격대장이 전등을 총으로 쏘는 모습도 담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15명을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듣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15명을 다 담기 위해 전문 작가들도 힘든 200호 캔버스(259.1×193.9㎝)에 6개월 동안 그린 작품이다.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최근 작업하고 있는 광주 6월항쟁 관련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최근 작업하고 있는 광주 6월항쟁 관련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김 이사장은 쉬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작업 중이다. 1987년 5월18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창립 선언식 그림이다. 6월항쟁을 이끈 국본이 처음 광주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릴 목적이다. 지난해부터 집필하고 있는 ‘윤상원 평전’도 곧 마무리할 예정이다. 윤상원을 다룬 저서는 다수 있지만 윤상원이 왜 죽음을 각오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윤상원 형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중앙위원이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총무였다. 둘로 갈라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나로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5·18 항쟁지도부도 이런 생각으로 꾸렸다. 상원 형이 잡혔다면 이 두 조직이 와해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항쟁 기록을 남기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도 했다. 꺼내기 힘든 기억과 미흡한 자료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고 있다.

     

     

    “그 시절에는 주변 사람들이 다칠까 봐 일기나 사진을 남기는 일은 드물었죠.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기록화라고 생각해요. 붓을 들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오월을 그리려고 합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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