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여

회원동정


    전남매일 바로가기 : http://www.jndn.com/article.php?aid=1582612401296015158

     

     

    [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전라도 이야기] 암태도 소작쟁의 사적비
    2020년 02월 25일(화) 15:33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신안군 암태도). 사적비 왼쪽에 1981년에 세워진 . 의사 서태석 선생 추모비가 있다. 서태석은 ‘암태도 소작인회’의 위원장으로서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전라도 이야기] 암태도 소작쟁의 사적비

    글·사진 김덕진 광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일제는 우리 주권을 강탈하기 전부터 경제침탈을 자행하였다. 그 가운데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시행했다. 그 결과 일본인 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같은 일본 회사 소유의 토지가 급증했고, 우리나라 농민들은 이전보다 더욱 영세화되었다. 1910년 말 일본인 소유 농토 가운데 자작지는 1%에 불과했고, 소작지가 99%에 이르렀다. 일본인만큼 많지는 않지만, 한국인 지주도 소작제로 농토를 경영했다. 그 결과 소작지는 꾸준히 증가 추세였다. 1916년 기준으로 한국의 전체 소작지율은 53.1%나 되었다.
    1910년대에 소작농들은 불안정한 소작권과 고율의 소작료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더욱이 일본인들의 토지 확대는 민족적 감정과도 맞물려 곳곳에서 충돌을 빚었다. 나주군 궁삼면과 무안군 하의도에서 농민들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일본인 지주와 투쟁을 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농민들의 조직적인 운동이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만한 단체가 미처 결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을 수탈당하고

    일제는 1920년대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시행하여 우리의 쌀을 수탈하였다.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들을 농업의 중심으로 삼는 식민지 지주제가 정착되면서 중소농민과 소작농들은 더욱 몰락하였다.
    이처럼 주권 강탈 이후 쌓여온 경제적 수탈에 대한 불만, 그리고 3·1운동을 통해 확인된 민족적 역량은 1920년대에 주체적인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소작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소작쟁의, 불합리한 수리조합산림조합 조건에 대항하는 반대투쟁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전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전라도의 소작쟁의 건수는 1920년대 1,882건으로 전국 건수 3,056건의 62%를 차지한다.

    ■ 아사동맹으로 맞선 암태도 소작쟁의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1923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 동안 전개된 암태도(巖泰島) 소작쟁의(小作爭議)이다. 이 지역의 대지주 문재철의 소작료 인상 횡포에 맞서,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조직된 소작인회에서는 소작료를 8할에서 4할로 인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문재철의 요청을 받은 경찰이 투입되어 소작인들과 마찰을 빚었으며 급기야 폭력사태가 발생하였고, 50여 명의 소작인이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말았다.
    이 소작쟁의는 전남뿐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소작인들을 지원하였다. 현지인은 물론이고 멀리 일본에서도 모금활동이 전개되었고, 무료변론을 자청한 김병로 등의 변호사도 있었다. 소작인들은 아사동맹(餓死同盟)까지 결성하며 단식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지 그 성공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1924년 창립되는 전국적 농민·노동자운동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전라도 소작쟁의, 전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다.

    다음으로 순천의 서면·쌍암면의 농민들은 1922년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안정을 요구하며 지주에 대한 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이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위해 주체적으로 농민단체를 결성해 나갔으며, 이 같은 움직임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그곳에 소작인 중심의 농민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그리고 초기에 면리 단위였던 이들 단체들은 점차 군 단위로 범위를 확대시켰으니, 1923년 2월에 결성된 순천농민대회연합회가 그러하다. 또 그리고 2월 말에는 순천·여수·광양·보성의 농민단체들이 연합하여 남선농민연맹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광주에서는 1922년 조선소작인상조회 전남지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어 영광·함평·나주·장성·구례 등지에 지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임원진 대부분이 대지주이거나 상공인으로서 소작인들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송정리에서 광산소작인조합이 조직되었으나 그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의 농민운동은 1923년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가 참여하고, 광주노동공제회가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 단체는 소작인들의 자각과 단결을 촉구하면서 소작인회 결성에 주력했다. 그 결과 군 소재 15개 면에 소작인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광주소작인연합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는 15개 면 소작인회의 연합체였다. 이 단체는 소작권의 안정과 소작료의 인하를 위한 활동을 벌여 한 달 만에 300여 소작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지주들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일제타도와 토지혁명을 주창하다.
     
    매일신보.. 1924년 4월 17일자 : 서태석 등 암태도 소작인회 회원 30여 명이 목포 형무 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사건이 크게 확대될 모양이라고 보도되었다.
    한편, 1930년대에는 세계대공황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물론 조선의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농민 수탈도 가중되었다. 세계대공황은 지주에게 큰 타격이었다. 농산물 값은 폭락하고 논을 사고 수시시설을 위해 빌린 이자 때문이었다. 이에 지주들은 농삿일에 개입하고, 소작료를 인상했으며, 조세공과를 소작농에게 전가했다. 특히 조선인 지주는 일제의 관제기구에 참여했다. 그런 만큼 농민들의 저항도 커져갔으며, 울분을 참지 못한 농민들이 일제와 지주에 맞서 투쟁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그러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농민운동의 형태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혁명적(또는 赤色) 농민조합운동이었다. 전남에서는 전체 22개 군 가운데 16개 군에 혁명적 농민조합이 조직되었다. 함경남도 다음으로 높은 비율이었다. 이들 조합은 단순한 농민들의 권익보장 차원을 넘어 일제타도와 토지혁명이라는 ‘혁명적’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다.

     
    김덕진 교수 .전대 사범대학 국사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졸업 .현 광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현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현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

    김덕진 교수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