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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죽인다


    주홍
    치유예술가
    샌드애니메이션 아티스트

    • 입력날짜 : 2020. 01.02. 19:35

    새해 첫 날 아침 명상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물 한 잔을 마시고 호흡을 바라보고 그저 앉아 있었다. 세상에서 달리는 시간을 멈추는 일이고, 시간을 죽이는 일이다. 새 해 첫 날부터 시간을 죽인다니,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달려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향 하나를 사르며 호흡만 바라보고 한 호흡 한 호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에 이름을 붙이는 놀이를 했다. ‘편안한 마음’, ‘고요한 마음’, ‘집중하는 마음’…. 해야 할 일들이 갑자기 밀물처럼 떠올랐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작업들도 떠오르고 집안일도 끝이 없다. ‘산란한 마음’, ‘조급한 마음’…. 이렇게 이름 붙이자 마음의 상태가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오늘 할 일들이 떠오르며 스쳐갔다. 가족들과 떡국을 끓여서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집을 정리하고 저녁엔 존경하는 스승님의 초대로 오빠 내외와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새해 첫 날 하루가 아침 명상에서의 영상처럼 지나갔다. 정말 근사하고 멋진 새해 첫날을 보냈다. 이렇게 새해 첫날처럼 올해는 더 명상하며 시간을 죽이고 살아야겠다. 더 단순해져야겠다. 끌려 다니는 시간을 죽이고 온전히 나의 시간을 살아야지, ‘뭣이 중헌가’를 생각해 본다.

    광산구 고려인마을 부근 100m 정도의 아파트 벽은 어둡고, 담배꽁초 등 쓰레기가 버려지며 밤이면 걷기 무서운 곳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더러운 벽이었다. 밝고 컬러풀하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있어서 벽을 몇 번 지나가 보았다. 걷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고려인 마을로 갈 때는 그 길로 걸어가면 한적한 산책길의 느낌이겠구나 생각했다. 갈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남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우리말을 하는 사람보다 러시아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필리핀, 베트남, 몽골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주로 걸어 다니는 곳이었다. ‘어떻게 이 벽에서 즐거운 소통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 밝고 예쁘게 그려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도 반영하고 싶었다. 팝아티스트 고근호 작가가 다양한 아시아의 연주와 춤들을 로봇캐릭터로 컬러풀하게 담아냈다.

    나는 그 벽이 바라보이는 건너편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명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보면 멍 때리며 일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눈을 감고 있는데 ‘함께 추는 춤’이라는 주제와 함께 그림이 떠올랐다.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떠오른 이미지를 벽에 옮겨 그렸다. 한 쪽 벽에는 어떤 청소년이 그린 귀여운 부엉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 부엉이도 예쁘게 살리고 싶었다. 자작나무 숲에 부엉이가 앉아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작나무 숲을 그려서 완성했다.

    추운 날 밖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으니 동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고생한다고 따뜻한 빵을 주기도 했다. 동네 분들의 온정이 느껴져서 더 따뜻하고 맛있었다. 이런 살아있는 현장의 작업을 나는 사랑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으로 바라보고 말을 걸어온다. 살아있는 소통이다.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어떤 아저씨는 “추운디 벼람박에다 뭐하요?”하고 묻는다. 그건 안부인사의 다른 말이다. 추운 곳에서 고생한다는 격려다. “잘 그리요 잉~” “아따 이삐요!” 할머니들이 지나가면서 사랑스런 인사를 건넨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의 몸동작을 따라하는 아이들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 끼리 그림을 보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너는 어떤 그림이 좋아?” “춤추는 투명인간!”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투명인간을 그린 적이 없는데 내 그림이 그렇게 보였구나. 생각하며 미소 짓게 된다.

    지난해 내내 정말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모든 일을 ‘노동’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다. 오월광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쓰레기를 치웠으며, 한 겨울 추위에 길에서 벽화를 하며 보냈고, 2019년 12월31일, 마지막 날엔 한반도 평화의 길을 내는 코라시아 로드런 공연에 참여하여 광주 양림동 오거리에서 드로잉퍼포먼스를 하며 보냈다. 손이 시렵고 먹물이 얼어서 샤베트처럼 굳어서 붓이 잘 나가지 않았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매일 매일이 다 좋았다. 특히 서로 격려해주는 좋은 인연들과 함께 해서 좋았다. ‘시간을 죽인다’는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날마다 창조적인 나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올해도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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