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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가족 함께 겪은 '오월의 기억' 39년만에야 펴낸 까닭은"

     

    ‘녹두서점의 오월’ 공저자 김상윤·정현애·김상집씨

     

     

     

    입력 2019.05.16. 03:46

     

     

     

     

     

    지난 13일 전남 당양군 대방리 자택의 서재에서 김상윤(가운데)·정현애(오른쪽)씨 부부와 동생 김상집(왼쪽)씨가 39년만에 <녹두서점의 오월>을 출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1980년 ‘5·18’ 때 광주에서 미군 501정보여단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김용장 군사정보관과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지난 13일, 실시간 속보로 보도되는 두 사람의 ‘39년만의 증언’에 누구보다 감회어린 이들이 있었다. <녹두서점의 오월>(한겨레출판사 펴냄)의 세 공저자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부인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이사장·남동생 김상집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지부장이다.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을 역시나 39년 만에 글로 증언해낸 세 가족을 김씨 부부가 살고 있는 전남 담양 대방리 마을에서 만났다.

     

     

    전남대 ‘반유신 민주운동’ 앞장 큰형 김상윤씨
    1977년 전남도청 근처 금서 전문 책방 열어
    80년 ‘5·17’ 예비검속 당해 옥중투쟁

     

    ‘우리 가족은 여섯 사람이 5·18유공자다. 당시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나를 비롯하여 아내 정현애와 처제 정현순, 남동생 김상집과 여동생 김현주 그리고 훗날 현주와 결혼한 엄태주까지 모두 5·18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대표 저자인 김상윤씨가 쓴 책의 서문 첫 문장이다. 그런데 필자로는 세 사람만 참여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끝내 참여하지 못한 이유를 들어보면 이들에게 증언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리 가족의 활동 궤적을 한 곳에 모으면 5·18항쟁의 전 과정과 10일간의 핵심 활동이 축소판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자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마저 싫어했어요. 지금까지도 해마다 몸으로 정신으로 마음으로 ‘5월 앓이’를 하고 있으니까요.”

    김상윤 고문은 전남대에서 유신 반대 운동으로 제적당한 뒤 독서모임 등을 꾸리다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금서를 보급하고자 1977년 광주의 서점거리였던 계림동에 헌책방 ‘녹두서점’을 열었다. 문병란 시인이 ‘녹두 장군 전봉준’에서 이름을 따주었다. 이듬해말 서점을 전남도청 인근 장동으로 옮긴 그는 79년 ‘10·26’ 이후 복학해 광주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80년 5월17일 밤 11시30분 신혼집이기도 했던 서점에서 그는 이른바 ‘예비검속’을 당했다. 광주 외곽의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낭자한 그곳에서 재판에 넘겨지는 두 달 동안 ‘빨갱이 조작과 사형 음모’에 맞서 사투를 해야 했다.

     

     

    금서 사러 갔다 인연맺은 부인 정현애씨
    서점 신혼방에서 ‘5·18’ 상황실 꾸려

     

    정현애 이사장은 1977년말 고교 동창의 소개로 금서였던 리영희 교수의 <8억인과의 대화>를 사러 녹두서점을 처음 찾았다가 그 인연으로 1년 뒤 서점 주인과 결혼했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80년 5월 17일 남편이 검은 지프차에 실려 사라지자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지만 이튿날 새벽부터 자신처럼 남편이 구속된 송백회 회원들, 서점을 찾아오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 광주 지역 민주인사들과 연대하면서 시간대별로 상황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5월27일 계엄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그는 항쟁의 상황실이었던 서점을 지켰다.

     

     

    제대뒤 방직공장 취직 동생 김상집씨
    보름만에 항쟁 터지자 ‘시민군 지도부’로

     

    김상집 지부장은 광주일고 시절 전국 첫 고교생 반유신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된 뒤 1980년 5월1일 군복무를 마치고 방직공장에 갓 취직을 했다. 입대 전부터 함께 했던 야학 노동자, 청년들과 독서토론 모임을 하던 그는 5월 18일 새벽 들불야학 강학인 윤상원으로부터 형의 체포 소식을 듣고 함께 녹두서점으로 달려갔다. 불과 보름 전까지 자신이 복무했던 부대의 500MD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위협하고,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차별 살육하는 만행을 목도한 그는 시민군 지도자로 열흘간 온몸으로 항쟁에 뛰어들었다.

    “우리가 기록을 남기기로 뜻을 모은 것은 2012년부터였어요.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 같은 허황된 소리가 퍼지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80년 그때처럼 또다시 폭도로 몰아 왜곡하는 ‘역사의 퇴행’ 시도를 보면서 ‘진실’을 알리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죠.”

     

     

    1980년 5·18 때 녹두서점이 있던 옛 전남도청 인근의 장동 사거리에는 사적지 표지석만 남아 있다. 지난 8일 김상윤(오른쪽부터)·정현애·김상집씨가 <녹두서점의 오월> 출간을 기념해 함께 방문했다.

     

     

    5·18항쟁의 상황실이었던 녹두서점의 상징성을 가장 먼저 조명한 것은 ‘2016 광주비엔날레’ 때 스페인 설치미술작가 도라 가르시아였다. 그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녹두서점을 기록과 증언을 통해 실제처럼 재현해냈다. 사진 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회

     

     

    하지만 30년 넘게 애써 지워왔던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려 원고를 정리하고 모으기까지 무려 6년이 걸렸고, 그뒤 책으로 편집하는 데 1년이 더 걸렸다. 무엇보다 첫번째 독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읽어내는 데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언론 인터뷰나 강연 등으로 각자 체험을 소개한 적은 많았지만, 식구들끼리 모여서 ‘5·18’ 얘기를 꺼낸 적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원고를 보고서야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아요. 특히 나는 내내 감옥에서 고문과 수사를 당했으니까 가장 오랫동안 심하게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도 동생도 죽을 지경으로 맞았더군요.”(김상윤)

    실제로 책에는 ‘5·27’ 진압 직후 정 이사장 자매와 김 지부장이 맨처음 서석병원 옥상으로 함께 끌려온 장면, 다시 상무대 영창에 끌려와 김 고문까지 한 가족들이 벽과 창살을 두고 엇갈리는 장면 등 기막힌 이야기들이 퍼즐처럼 이어진다.

    “남편이 나와 처제·여동생의 석방을 조건으로, 조작인 줄 알면서도 ‘김대중 내란음모 가담 진술서’에 서명해야 했던 과정, 사형을 피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 ‘항소이유서’ 작성 과정 등을 이번에야 자세히 알게 됐어요. 그런 한편으로 먼저 풀려나 폐허가 된 녹두서점을 ‘한얼서점’으로 바꾸고 남은 책을 월부로 팔아 재고와 빚을 정리하기까지 9년이 걸렸고, ‘사형’ 위기의 남편과 시동생 옥바라지에 석방운동하느라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어요.”(정현애)

    “항쟁 막바지에 서점 앞에서 막아서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윤상원 대변인에게 일지를 전해주러 뛰쳐나간 적이 있어요. 이번에 형수님 글에 보니, 그뒤 아버지가 ‘상윤이는 끌려가고 상집이까지 죽으면 안된다’며 내내 우셨다고 해서 새삼 가슴이 아팠네요. 우리 집안은 ‘울산 김씨’의 집성촌이 있는 장성에서 6·25전쟁을 맞아 조부모님 등 무려 8명이 좌익 민병대에게 희생당한 비극을 겪었거든요.”(김상집)

    바로 그 한국전쟁 때 내력 때문에 김 고문을 비롯한 ‘지도부’를 빨갱이로 몰려했던 신군부 조사관들이 시나리오를 바꿨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있다.

     

     

    ‘5·18 시민군’ 김상집 지부장이 1980년 5월26일 오후 6시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계엄군의 진입 통보를 받고 시민군 지도부가 마지막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던 모습을 재구성해 직접 그린 ‘결사항전’ 작품. 왼쪽 창가에 서 있는 윤석루 기동타격대장과 윤기현 YWCA대외협력팀장, 탁자 왼쪽부터 윤강옥 기획위원, 허규정 내무위원장, 박남선 상황실장, 이양현 기획위원 김준봉 조사부장, 맨가운데 정상용 민주투쟁위 위원장, 그 오른쪽부터 김영철 기획위원장, 윤상원 대변인, 구성주 보급부장, 김종배 부위원장(직전 학생수습대책위 위원장), 정해직 민원실장, 뒷모습이 김상집 지부장.

     

     

    김 고문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대목은 ‘시민군의 등장’이다. ‘5월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집단발포했다는 소식에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한 정현애와 김상집은 피신하려고 서점을 빠져나온 순간 총을 들고 도청 쪽으로 향하는 시민군의 행렬을 만난다. 대학생과 지식인 등 운동권들의 예상을 뒤엎고 기층민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혁명이 떠오르는 순간 아닌가요? ‘인간 선언’의 순간이지요!”

    실제로 책에는 항쟁에 뛰어든 시민들이 조직되거나 훈련된 ‘전사’가 전혀 아닐 뿐더러, 내 나라 군인들의 무차별 폭력에 쓰러지는 가족과 이웃을 지키고자 맞서 싸우고 ‘주먹밥’과 ‘헌혈’로 서로를 살리고자 애쓰는,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였음을 증언하는 일화들이 가득하다.

    “전두환의 뻔뻔한 거짓말부터 국회의원들의 망언과 온갖 폄훼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진상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5·18’ 관련자들이 민주유공자로 보상을 받긴 했지만, ‘4·3’처럼 특별법을 제정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야만 근본적인 왜곡 시비를 막을 수 있어요. 이 책이 널리 익혀 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옛 전남도청 자리에 조성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북단이자 녹두서점 표지석 건너편에 서 있는 조형물. <녹두서점의 오월>에서 김상윤 고문은 ‘5·18’의 검은 상흔을 딛고 초록빛 희망을 싹틔우는 광주의 미래를 담은 상징으로 풀이한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지금껏 5·18 국가 공식 기념식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는 김 고문은 “쑥쓰럽지만, 젊은 세대에게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북토크나 강연 같은 자리에 나서볼 참”이라고 했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동시에 수첩을 꺼내 일정을 맞추는 세 필자는 이달말께 광주에서 먼저 출간기념 북토크쇼를 한 뒤 서울을 비롯 전국 어디든 달려가 독자들과 만날 계획이다.

     

    담양/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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