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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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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확산...320개 학교 5만4천 명 참여
    -남도는 임란과 한말의병, 동학농민운동 중심지...불의 용납 않는 정신 이어져
    -곡창 호남에서 일본인의 경제적인 수탈도 일제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식 키워
    -민족차별교육에 반발, 1920년대 광주지역 맹휴투쟁이 학생독립운동의 원동력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1월 3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RbHD5odG6iI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출발! 무등의 아침, 지창환입니다. 1929년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입니다. 올해로 92주년이 되었는데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그리고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리지만 왜 이 사건이 발생했는지 또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출발 무등의 아침에서는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시간에 92주년 맞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방송은 유튜브에서도 실시간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어서 오십쇼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주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요.

    ◆ 노성태: 오늘 특별한 날인 것 같습니다.

    ◇ 지창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지요.

    ◆ 노성태: 1929년 11월 3일이니까 오늘이 꼭 92주년이 되는 날이거든요. 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 독립 운동이었는데, 이것이 광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320개 학교, 5만 4000여명이 참여했던 운동이었는데 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광주에서 먼저 시작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을 기려야 되는 것인지를 앞으로 세 번 정도 애청자 여러분과 만나고 싶은데요. 오늘은 왜 발발했는지 배경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앞으로 세 번 말씀하실 텐데 오늘은 왜 발발했는지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광주에서 전라도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됐잖아요. 왜 전라도 땅에서 시작됐는지 이유가 있습니까?

    ◆ 노성태: 역사 속에서 남도인들이 보여주었던 시대정신인 정의로움의 실천 사례를 먼저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광주, 전남을 비롯한 남도는 임진왜란, 그리고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잖아요.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적지가 황토현, 황룡촌, 우금치, 석대들 전적지 이렇게 우리나라에 4개가 있는데 그중에 황룡촌은 장성 황룡촌이고요. 석대들은 장흥 석대들이기 때문에 2개가 우리 지역에 있는 것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광주에서도 3.10만세 시위가 있었고, 이때 앞장섰던 사람들이 숭일, 수피아, 농업학교, 광주 보통학교 학생들이 앞장서게 됩니다. 이런 광주인들의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실천했던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정체성, 기질은 꼭 10년 후인 29년 11월 3일 학생들에 의해서 그대로 이어진 것이지요.

    ◇ 지창환: 학생독립운동이 전라도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배경이 있었다. 호남 지역이 곡창지대기도 했잖아요. 경제적인 수탈도 배경에 깔려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노성태: 특히 영산강 유역인 나주 영산포 지역이 드넓은 평야 지대잖아요. 1910년대 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고 많은 땅을 빼앗아 가는데 제가 조사해 보니까 1930년 무렵 나주의 일본인 1인이 소유한 토지 면적은 1만여 평 정도 되고요. 이에 비해서 조선인 1인 소유의 토지 면적은 300평에 불과하니까요.

    ◇ 지창환: 33배.

    ◆ 노성태: 그 정도 되는 것이지요. 일본인 지주 자식과 함께 광주에 통학해야 했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당시 나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가진 일본인이 구로즈미 이타로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당시 거주했던 집이 지금도 나주 영산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소유했던 토지가 무려 330만 평인데 규모가 감이 좀 오나요?

    ◇ 지창환: 전혀 감이 안 옵니다.

    ◆ 노성태: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가 30만 평이니까 10배, 11배가 되는 크기의 땅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주와 나주를 통학했던 학생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민족 의식을 키워나갔던 것이지요.

    ◇ 지창환: 이렇게 토지 소유, 경제력의 차이가 너무 크고 차별을 많이 느꼈겠네요.

    ◆ 노성태: 교육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학교 교육에 대한 불만도 배경에 있었는데 학교 시설, 교육 내용이 일본 학교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고요. 학교 명칭이라든가 수업연한도 일본인과 차이를 받았습니다. 일본인이 다녔던 초등학교는 소학교였고 그리고 한국인이 다녔던 소학교는 보통학교였던 것이고요. 일본인은 중고등학교를 중학교라고 불렀습니다. 광주중학교. 그런데 우리는 고등보통학교.

    ◇ 지창환: 학교 이름도 그렇게 차별이 있었네요.

    ◆ 노성태: 고등보통학교를 두 자로 줄이면 고보가 되는 것이고요. 앞에 광주고보 그러잖아요. 3.1운동 이후에 신교육령을 22년에 발표합니다만 수업연한을 일본과 동일하게 고치는 등 유화정책을 펴게 되지만 그때 국어는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였던 것이지요. 국어 교육 즉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일본 역사 시간을 늘렸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국어의 경우, 그러니까 고보 국어의 경우 일본어 및 한문은 주당 32시간, 이에 반해서 조선어 및 한문은 주당 12시간밖에 안 됐으니까 일본어 국어 공부 시간이 3배 정도 더 많았던 것이지요.

    ◇ 지창환: 조선인 학생에 대한 교육 차별, 한국 학생에 대한 교육 차별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당대 지식인이었고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학생들이 가만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전개했던 싸움이 동맹휴학투쟁인데요. 이것을 줄이면 주로 맹휴투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맹휴투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학교 설비라든가 이런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한국 학생들을 무시했던 일본인 교원 배척이 가장 주된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남도를 대표했던 학교, 남도의 수재들이 모여들었던 1920년대 광주고보에서 네 차례 맹휴투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당시 우리나라 관립학교, 공립학교에서 네 차례 이상 맹휴투쟁이 발생한 학교는 광주에 있는 광주고보가 유일했으니까, 투쟁의 강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 지창환: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주로 대학생들이었잖아요.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운동의 주류는 중고등학생이었던 모양이에요.

    ◆ 노성태: 그때는 대학이 없었지요.

    ◇ 지창환: 광주고보가 지금 광주일고잖아요. 광주고보에서 맹휴투쟁이 네 번이나 일어났다고 했는데 야구 시합 때문에 일어나기도 했다면서요?

    ◆ 노성태: 지금도 일본은 야구로 유명하지요. 1924년 6월, 두 번째 맹휴투쟁인데요. 광주고보와 일본인 선발팀 사이에 야구 경기가 발단이 됩니다. 1:0으로 광주고보가 이기고 있었고 9회 말인데, 일본 대표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다가 태그 아웃이 되니까 그때 일본팀 응원단장이었던 안도라고 하는 사람이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에게 행패를 부리게 되자 광주고보 학생들이 안도를 집단 구타하면서 한일 학생들 사이에 패싸움으로 번지게 되지요.

    ◇ 지창환: 패싸움으로 번졌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한국 학생들만 잡혀 갔나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짜증이 나는데요. 싸움은 경찰에 의해서 해산됐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광주고보 선수들만 경찰에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400여명의 광주고보 학생들이 경찰서로 몰려갔고 선수 석방을 요구해서 다음 날 학생들은 풀려나지만 광주고보 교장 일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학생 400여명에게 무기정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학생들은 교장 사퇴를 요구하면서 수업을 거부한 맹휴투쟁을 단행했고 9월에 수습이 되지만 맹휴투쟁을 주도했던 고광우라든가 국채덕 이런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 지창환: 전교생에게 모두 무기징역을 때렸다는 것은 처음 들어봅니다.

    ◆ 노성태: 거의 전교 학생입니다. 그때 전교생이 500여명이었거든요.

    ◇ 지창환: 야구 경기 때문에 맹휴투쟁을 했었고...광주고보생들이 총 네 번의 투쟁을 했는데 가장 치열했던 맹휴투쟁은 어떤 것입니까?

    ◆ 노성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8년도 6월에 일어난 이경채 사건이 배경이 되어 일어난 네 번째 투쟁이 가장 치열했습니다. 1928년 4월 고보 5학년이면 최고 학년이거든요. 그때 5년제였으니까. 이경채가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서 격문을 인쇄해서 광주역 파출소라든가 고보 앞이라든가 10여 군데에 인쇄물을 붙이니까 일본 경찰은 난리가 났고 두 달 후에 이경채가 체포가 되는데 재판도 열리기 전에 일본인 교장이었던 시라이가 이경채를 퇴학시킵니다. 재판을 받고 죄가 확정이 됐을 때 해야 되는데. 그래서 이에 맞서서 28년 6월 26일 1학년을 제외한 400명이 강당에 모여서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투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교장이 문제인데 보니까 일본인 교장이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때 광주고보 교사들이 20~30명 됐나요? 학교인 교사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

    ◇ 지창환: 광주고보생들의 맹휴투쟁 중 가장 치열한 것이 이경채 사건. 퇴학을 시키고 맹휴에 돌입하고 그냥 끝난 것 같지않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맹휴투쟁을 고보생들이 구성을 하고 4개월 동안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때 인근에 있는 농업학교 학생들도 맹휴투쟁에 동참을 했고요. 맹휴투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27명을 주동자로 퇴학을 시키고 또 280여명을 무기징역에 처하게 됩니다. 아까 야구 때문에도 대부분 무기정학을 받게 됐잖아요. 광주고보생이 말씀드린 것처럼 500여명인데 1학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9월 17일 등교로 4개월 만에 막을 내렸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동자 8명이 재판에 회부되어서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 지창환: 이경채 사건으로 인한 맹휴투쟁 심각했네요. 후폭풍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네. 말씀드렸던 것처럼 8명이 재판을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39명이 퇴학 당했고, 3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무기정학을 당했으니까 계속 말씀을 드리지만 학생 수가 500여명이었는데 전교생이 징계를 당한 셈이지요.

    ◇ 지창환: 맹휴투쟁이라는 것이 동맹휴학을 줄인 말이잖아요. 동맹휴학을 줄인 맹휴투쟁, 학생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요. 결과적으로 성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노성태: 물론입니다. 1920년대 네 번에 걸친 고보생들의 맹휴투쟁은 학교 시설 보완이라든가 교사 파면, 야구 시합 당시의 불공정, 일제 타도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학생들의 투쟁 역량 강화, 이것이 29년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창환: 학생들의 의식이 성장했다 이것이지요.

    ◆ 노성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발을 다시 정리하면 정치적인 압박, 경제적 수탈, 민족 교육 차별 등이 밑바탕에 깔려는 있었지만 네 번에 걸친 특히 마지막 1년 전 이경채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맹휴투쟁으로 인한 학생들의 투쟁 역량이,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이듬해 29년 11월 3일 발발한 학생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네 번에 걸친 맹휴투쟁이 학생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 노성태: 그 저변에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광주인들의 DNA가 이런 것들에 의해서, 학생들에 의해서 폭발됐던 사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 지창환: 당시의 시대정신, 광주 전라도인의 DNA가 폭발을 했는데 맹휴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 노성태: 직접적인 투쟁 역량의 강화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 지창환: 아까 말씀하신 대로 오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배경을 말씀해주셨고 다음 주, 그다음 주에는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미.

    ◆ 노성태: 어떻게 기리고 계승해야 될 것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 지창환: 계속 기다려보겠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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