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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대마도의 최익현 순국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지난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16일에 처음으로 대마도 여행을 하였다. 이즈하라 수선사(修善寺)에서 면암 최익현(1833~1906) 순국비를 보았다. 비 앞면에는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감옥에서 순국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 될 때 이 절에 머물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걱정스러워 이 비를 세운다. 1986.8.3. 한국 대표 황수영 찬”이라고 적혀 있다.

    비 옆면에는 비를 세운 한국과 대마도 위원들 이름이 적혀 있다. 한국 측은 대표위원이 황수영이고 위원은 일해재단(日海財團), 김기환 등이다. 그리고 보니 이 비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일해재단이 나서서 건립한 것이다.

    당시 순국비 제막식 때 KBS 취재팀이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카도메 히사에와의 인터뷰에서 “항일투사의 순국비를 왜 일본에 세우는가?”라고 질문하였다. 나카도메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같다. 이를 주창하는 것이 곧 무사도(武士道)이다”라고 답하였다.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는 붓과 칼의 차이가 있지만….

    그러면 최익현의 항일의병과 대마도 순국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은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민영환 · 조병세가 자결하고 최익현 등 선비들은 잇달아 ‘을사늑약은 무효이고 이완용·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상소운동은 효과가 없었다.

    최익현은 의병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전라도를 주목하였다. 경기도 포천 출신이지만 위정척사론자로 명망이 높았던 최익현은 전라도에도 문인이 여러 명 있었다. 그는 문인 고석진의 주선으로 임병찬(1851∼1916)을 만났다. 임병찬은 전북 옥구 출신으로 낙안군수를 하였으며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체포에 공을 세워 전투경험이 풍부하였다.

    이어서 최익현은 1906년 5월29일에 담양 추월산 용추사에서 기우만 등 호남 유생 50명과 만나 대일항전을 협의하였다. 6월4일에 최익현은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거의(擧義)를 호소하였다. 80명의 유생들이 즉시 자원하였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최초의 호남의병인 태인의병이 조직되었다.

    최익현은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라는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 (義擧疏略)’을 배포하면서 의병모집에 전력을 다했다. 특히 그는 포수확보에 치중하였는데 포수 채상순도 초대 대법원장을 한 가인 김병로와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을 따르는 의병은 900여명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와 일제는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일제는 광주·전주·남원·안동의 조선군을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토록 하였다.

    6월12일에 순창전투가 일어났다. 교전해야 할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을 명하였다.

    6월14일에 진위대는 최익현과 ‘12 의사(義士)’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2 의사’는 임병찬·고석진·최제학·김시술 등이다.

    8월14일에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 대마도 감금 2년, 고석진·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부산포 초량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바닥에 조선의 흙을 깔았고 임병찬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게 했다. 일본 땅에서도 일본의 흙을 밟지 않고 일본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8월27일에 대마도 이즈하라 일본군 위수영에 투옥된 최익현은 단식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4개월 후인 1907년 1월1일(음력 1906년 11월17일) 새벽에 순국하였다. 나이 74세였다.

    최익현의 시신은 수선사에 옮겨졌다. ‘왜인들도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줄지어 조문했다. 1월5일에 시신이 부산에 이르자 장사꾼들이 시전을 철수하고 통곡하였다. 승려·기생·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를 들고 와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동래에서 떠나던 날에는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다.(황현의 <매천야록>)’

    청나라의 원세개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추모 글을 보내왔다. 그런데 정작 조선 조정에서는 애도의 뜻 하나 표하지 않았다. ‘나라 없는 나라’에서 친일파만 득실거렸으니 무슨 기대를 하리오. 1월20일에 최익현은 충남 예산군 무동산 기슭에 묻혔다.

    사족(蛇足) 같지만 특이한 것은 이즈하라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대마도 관광지도’의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비’에 나와 있는 해설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애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쓰시마에 유배된 뒤 순국했다. 훗날 뜻있는 사람들이 그 넋을 기려 수선사 절 안에 이 비를 세웠다”

    (남도일보 칼럼 11월 18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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