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여

문화칼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

     

                                                                    김 상 윤(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

      

    나간채교수로부터 대구에서 80년 오월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일 뿐만 아니라 아내와 처제,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남편까지, 모두 여섯 식구가 광주민주화운동에 연루된 오월가족입니다.

    그래서 더욱 805월의 트라우마가 심한 사람입니다. 여기 대구여서가 아니라 805월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싫고, 805월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나 연극, 소설 등을 대할 때도 섬뜩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광주가 대구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대구가 광주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805월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설득에 그만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사를 읽지 않아도 전봉준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삼일운동 역시 유관순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쿠바혁명은 체 게바라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805월을 인상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 저는 윤상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저는 1974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사건으로 12년 형을 언도받았으나, 19752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습니다. 당시 윤상원은 군대를 제대하고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으로 복학하여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테니스를 즐기는 멋쟁이였고 연극반 소속이기도 했습니다. 윤상원은 나를 만난 충격으로 외무고시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나와 더불어 전남대 안에 비밀 학습조를 만들어 소위 의식화작업을 하였습니다. 비밀 학습조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자 나는 녹두서점을 만들어 학습조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80년 당시에는 윤상원도 녹두서점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하였습니다.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지요.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한 평생을 같이 하기로 결심했지만, 부모님에게도 효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무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놀고 있다고 대답하시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주택은행에 취직한 사실 자체로 효도를 했다고 생각한 윤상원은, 짧은 취직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와 들불야학 일에 참여하였고, ‘한남플라스틱이라는 회사에 노동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말로만 노동자와 함께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자신의 삶을 노동자들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던 그에게 805월 광주항쟁은 매우 돌발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윤상원은 이태복(전 복지부장관)과 유동우(‘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저자)가 주축이 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으로 이미 참여하고 있었고,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805월항쟁이라는 뜻밖의 사건이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있던 동지들을 설득하려 했고,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노력이 좌절되자 그는 온몸을 던져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맞이하게 된 셈이지요.

     

    박정희대통령의 암살로 전국이 들썩였고 광주에 있는 대학들도 모두 민주화운동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복학생들은 어용교수문제를 제기했고, 노학연대 투쟁이나 농학연대 투쟁의 연결고리 역할도 하였습니다. 특히 519일은 함평고구마사건’ 2주기여서 전남대 총학생회와 가톨릭농민회 조직을 연결하는 문제로 517일 밤늦게 까지 이병철(민청학련 관련자, 부산대 출신), 노금노(가농 전남 총무) 등과 녹두서점에서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피신하기로 하였으나, 저는 밤 1130분 경 권총을 들이대는 4명의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505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저처럼 소위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518일부터 전개되는 광주민중항쟁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지 못했고,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통해서 간접 체험을 한 셈입니다.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있던 사람들이 예비검속으로 상당수 체포되니 체포를 피한 사람들은 당연히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주화 성회라 명명된 (514일부터 516일까지의) 3일간의 학생시위를 이끌던 학생지도부도 일부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아니 한 사람들은 모두 잠적하였습니다.

     

    518일부터 진행된 ‘10일 간의 항쟁은 운동권의 2선이라 할 수 있는 청년 학생들과 밑바닥 기층 민중들이 주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들불야학에 참여하고 있던 강학(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들과 노동야학 학생들은 투사회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현장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도부들과 함께 시민군들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때 운동권 지도부를 찾다 실패한 윤상원은 투사회보팀을 지휘하고 수습대책위를 만드는 등 527일 새벽 도청 투쟁본부에서 산화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광주를 지켰습니다.

     

    학생들은 민주화 성회를 마무리하면서, 만약 휴교령이 내릴 경우에는 전남대학교 정문에 집결한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518일부터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자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엄군들은 바로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고,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도청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공수부대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몽둥이로 후려치고 대검을 찔러댔습니다. 그때의 참상은 많이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521일 늦은 오후에 계엄군들은 소리 없이 도청에서 철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27일 새벽까지를 해방 광주라 부릅니다. 해방광주 7일 동안 단 한 건의 범죄행위도 발생하지 않은 사실을 광주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는 ‘10일 간의 항쟁대동세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나눔의 광주공동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엄군이 철수한 521일부터 정보기관에서 심어놓은 프락치들이 시민군을 교란하고 있었고, ‘독침사건을 비롯한 내부교란뿐만이 아니라 수습대책위원회 수뇌부까지 정보망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투항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투항파 수습위와 맞서는 투쟁파수습위를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윤상원입니다. 투쟁파 수습위는 525일부터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도청 지도부의 목소리는 오월광주항쟁을 대변하는 진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윤상원은 이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이 되어 모든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를 하던 외신기자들이 이번 5월행사에 초청되어 광주를 방문합니다.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였던 브래들리 마틴 역시 초청되었는데,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던 윤상원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의 기사는 하나의 에세이로서 지금까지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후일 한국을 다시 찾은 마틴 기자는 정말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되기 전에 윤상원은 고등학생들과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도청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가라.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서유진 선생은, 윤상원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래, 우리는 죽어 너희들의 죄를 증명하겠다. 너희는 우리를 죽인 대신 너희들이 죽을 때까지 역사의 죄인으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그는 5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에 의해 사망합니다. 두 팔을 벌리고 죽은 그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