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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키운 문화기술 융합인재들이여, 이제 문화수도로 모여라
― 한국문화기술연구원보다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은 ‘사람이 모이는 생태계’다
김혜선(광주과학기술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융합’을 이야기해 왔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결합하고 인문사회와 디자인을 연결하며 서로 다른 학문과 산업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인재가 미래를 이끌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는 2000년대부터 문화기술(CT)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2005년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이 문을 열었고 이후 여러 대학에서 문화기술, 디지털문화콘텐츠, 미디어, HCI, 융합콘텐츠, 아트앤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이름의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문화와 예술을 공부한 사람이 기술을 배우고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인간과 문화의 문제를 연구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였다. 국가는 분명히 융합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키운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문화기술을 전공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연구할 전문 연구기관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부는 대학에 남았고 일부는 기업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이들은 문화기술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산업으로 이동하였다. 독립 연구자나 창작자로 활동하거나 해외로 떠난 경우도 있었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가칭)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 및 운영방안 연구」와 그동안의 CT 관련 논의에서도 문화기술 전문인력이 지속적으로 양성되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연구역량을 축적할 전담 연구기관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계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것은 이상한 국가 인재양성 정책이다. 사람을 길렀는데 그 사람들이 모일 곳을 만들지 않았다. 연구자를 만들었는데 연구자가 10년, 20년 동안 자신의 연구를 축적할 조직을 만들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제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 논의도 건물과 조직의 문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연구원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보다 먼저, 대한민국의 문화기술 전문인력이 어디에 모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광주는 이미 20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다 광주에서 문화기술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002년 문화수도 논의가 시작되었고 2006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2007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에는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설립·운영 계획이 반영되었다.
이후 광주과학기술원(GIST)이 문화기술 연구주관기관으로 지정되었고 2013년 한국문화기술연구소가 출범하였다. 한국문화기술연구소는 원래 대학 안의 작은 연구소로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단계적으로 확대하여 독립적인 한국문화기술연구원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광주에 자리 잡았다. 광주에는 과학기술 연구역량과 문화예술 현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에 인공지능, 실감콘텐츠, 미디어아트 등 새로운 기술 기반도 구축되어 왔다. 따라서 광주의 강점은 건물 몇 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 과학기술, 도시와 시민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기술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융합은 강의실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문화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융합’이다. 그러나 융합은 서로 다른 전공의 사람들을 한 회의실에 앉혀 놓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학자가 기술을 다 개발한 뒤 예술가에게 “이 기술을 이용해 콘텐츠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도 진정한 융합이라고 보기 어렵다. 융합은 연구의 시작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예술가와 공학자, 디자이너와 인문사회 연구자가 함께 있어야 한다.
문화기술에서 말하는 기술 역시 이공학 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문화기술은 인문사회, 문화예술, 디자인, 공학 분야의 지식과 노하우가 결합되는 영역이며 협업과 개방·공유·참여가 연구개발 과정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래서 문화기술에는 다른 연구분야와 다른 종류의 인재가 필요하다.
하나의 분야만 깊게 아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이들을 문화기술 융합인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은 단순한 다전공자가 아니다. 예술을 이해하면서 기술을 알고 기술을 이해하면서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고 서로 다른 전문분야 사이에서 질문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능력은 강의 몇 개를 듣는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사람과 함께 실패하고 논쟁하고 만들고 다시 고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융합인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교육과정이 아니다. 함께 일할 장소와 동료다.
흩어진 사람을 모으는 것이 국가 문화기술 정책의 시작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문화기술의 가장 큰 문제를 연구비 부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의 분산이었다. 문화기술 R&D는 ETRI, KIST를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과 대학, 기업에서 수행되어 왔다. 각각 뛰어난 연구성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국가적 역량으로 연결하는 구조는 충분하지 않았다. 2019년 CT R&D 현황 분석에서도 주관 연구기관 없이 여러 기관이 분산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면서 장기적인 정책수립과 성과관리, 기관 간 협력과 융합연구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연구과제가 끝나면 사람이 흩어진다. 사람이 흩어지면 경험도 흩어진다. 그리고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 연구는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기술의 축적은 결국 사람의 축적이다. 한 명의 연구자가 10년 동안 겪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다음 세대 연구자에게 전달될 때 국가의 연구역량이 된다. 그래서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연구과제를 많이 수행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기술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CT 인재들이여, 광주전남으로 모여라”
이제 광주는 과감한 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 2000년부터 대한민국이 길러온 문화기술 융합인재들이여, 광주로 모여라.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출신도 오고 문화콘텐츠와 디지털미디어를 연구한 사람도 오고 예술과 기술을 넘나드는 창작자도 오고 인공지능 연구자도 와야 한다. 역사학자와 철학자, 사회학자도 와야 한다. 디자이너와 공연예술가, 영화인과 음악가도 와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CT 1세대뿐 아니라 생성형 AI와 로봇, 디지털휴먼, XR을 연구하는 새로운 세대도 함께 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광주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광주에 오면 자신이 하고 싶은 문화기술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연구자가 움직이는 이유는 단순히 건물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함께 연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실험할 수 있으며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연구환경이 있을 때 움직인다. 따라서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은 전국의 우수 연구자들이 일정 기간 광주에 머물며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개방형 연구기관이 되어야 한다. 대학 교수와 출연연 연구자, 기업 연구원, 예술가가 6개월이나 1년 동안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연구자가 세계적인 연구자와 함께 연구하고, 예술가가 AI 연구자와 팀을 만들며, 지역기업이 그 연구성과를 새로운 콘텐츠와 서비스로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광주 전체를 하나의 문화기술 연구실로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광주에 설립된다고 해서 연구원 건물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반대여야 한다. 광주 전체가 연구공간이 되어야 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새로운 문화기술을 실험하는 세계적인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다. 광주의 공연장과 미술관, 박물관은 연구성과를 실증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지역 예술가와 시민은 기술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연구과정에 참여하는 공동 창작자가 될 수 있다. 기업은 연구원에서 개발된 기술을 산업화하고 대학은 새로운 인재를 공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연구 → 창작 → 실증 → 산업화 → 시민 향유 → 다시 연구
라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광주가 만들어야 할 문화기술 생태계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계가 형성된다면 광주는 단순히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기술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가 될 수 있다.
AI 시대에는 더욱 ‘사람’이 중요하다. 생성형 AI 시대에 오히려 이러한 융합인력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AI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영상을 생성한다. 디지털휴먼은 인간과 대화하고 역사적 인물까지 재현한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 기록을 AI가 학습해야 하는가. AI가 만들어낸 콘텐츠의 문화적 가치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역사적 인물을 디지털휴먼으로 되살릴 때 사실과 상상의 경계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문화유산 데이터를 누가 관리하고 어떤 윤리적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AI 엔지니어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인문학자와 역사학자, 예술가, 디자이너, 법·윤리 연구자와 공학자가 함께 답해야 한다. 바로 그래서 AI 시대에는 문화기술 융합인력이 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연구하고 논쟁하고 실험할 장소도 필요하다.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은 결국 ‘사람의 연구원’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을 이야기하면서 건물의 규모와 예산, 조직과 법적 지위를 많이 논의하였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서는 안 된다.
그 연구원에서 누가 연구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이미 많은 문화기술 인재를 길렀다.
이제 다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흩어진 사람들을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와 만나게 해야 한다.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의 진정한 출발점은 건물을 짓는 날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문화기술 사람들이 광주로 모이기 시작하는 날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이 어렵게 키워낸 문화기술 1세대에서 AI 시대의 새로운 융합인재까지.
이제 광주가 그들에게 말할 때다.
“대한민국의 문화기술 융합인재들이여, 문화수도 광주로 모여라.”
그들이 모이는 순간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