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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김범수, 107년 만의 명예 회복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재단 이사)

     

    광주 3·1운동에 불을 지핀 인물은 광주 출신의 경성의전 학생 김범수였다. 김범수(金範洙, 1899~1951)는 1899년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335~1번지, 재매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이다.

     

    김범수는 1923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생 23명 중 유일한 전남 출신이었다. 그가 당대 광주의 ‘수재’였음은 ‘중외일보’ 1929년 11월 1일자 “남선의원이라면 누구나 연상하는 바, 광주 ‘수재’라는 평가를 받는 김범수군의 병원일 줄 안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2월 2일, 도쿄 메이지 대학에 유학 중이던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1월 말 귀국, 찾아간 곳은 경성 송현동의 김범수 하숙집이었다. 정광호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김범수, 박일구 등 전남 출신들과 만나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뜻을 모은다. 이들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박일구의 처가인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 600장과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서 50장을 인쇄, 서울과 광주의 시위 당시 배포하였다.

     

    김범수가 광주 3·1운동의 견인차였고 핵심 인물이었음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받은 형량 중 가장 높은 3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김범수는 1년간 인턴 의사 생활을 마친 후 1924년 광주시 대인동 162번지에 ‘남선의원’의 이름을 달고 개원한다. 김범수의 남선의원 개원은 광주의 커다란 뉴스였다. 그것도 경성이 아닌 고향 광주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니, 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1924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김범수의 병원 개업에 관한 기사가 ‘남선의원 독지(南鮮醫院篤志)’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처럼 실려 있다.

     

    “광주 시내 서성정(전 광산의원 자리)에 영업을 개시한 남선의원은 종래에 총독부 의원에 근무하던 의사 김범수 씨의 경영인 바 내외 설비와 입원실도 완비되었으므로 일반 환자에게 편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씨(김범수)는 특별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

     

    그의 의사 개업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특히 “무산 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실제 그는 간호 조수(간호사)에게 “신발에 흙이 묻어있는 환자(무산 환자)는 십중팔구 가난한 농부들일 터이니 이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는 안되고, 또 일부러 접수를 거부해서 내쫓아서도 안된다”고 늘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약속한 대로 무산자 계급을 위해 약속을 실천하였다. 그의 의사로서의 삶은 민족과 민중을 향한 한없는 사랑이었고,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해방과 함께 여운형과 안재홍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창립하자, 8월 17일 광주극장에서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전남 건준)가 결성된다. 오방 최흥종이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광주의 수재였던 남선의원 원장 김범수는 조직부장에 선출된다. 그리고 김범수는 부위원장 김시중과 함께 전남 건준의 대표가 되어 조선 건준의 신임장을 받고 중앙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목탄 트럭을 타고 서울로 상경한다. 그 목탄 트럭에는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숨어 지내던 박헌영도 동승하고 있었다.

     

    김범수는 좌파와 우파 일부가 힘을 합쳐 1946년 3월 결성된 민족 민주주의전선(민전) 전남 지부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동광신문’과 인터뷰를 한 다음 기사를 보면 그가 해방 공간에서 어떤 이념을 지녔고, 실천했는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 또한 몇 개인이 합작하는 것보다 민족 전체가 협력하여 합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광주에 있어서도 좌우 합작은 필연 가능하다고 본다.”

     

    김범수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민전 등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에 참여하였지만, 이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1949년 가을, 이승만 정권은 김범수를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서 간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을 구금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조치에 따라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처가가 있는 화순 북면 원리로 피신했지만, 백아산의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에 의해 강제 징발당한다. 그가 피신했던 북면 원리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가 인근이었고, 의사임이 알려진 결과였다.

     

    강제 징발되었지만, 중환자 비트에서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인민군 부상병도 치료가 필요한 같은 민족일 따름이었다. 그는 1951년 4월, 부상자들을 돌보다 국군토벌대의 공격 중 사망한다.

     

    광주 3·1운동의 견인차이자 민중을 사랑했던 참의사였고, 좌·우를 넘어 통일 조국을 꿈꾸었던 김범수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는 좌익이었다는 이념의 굴레가 씌워져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올바른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남도역사연구원’과 ‘동고송’ 등 각계 각층의 노력으로 좌익 활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의 활동이 재 조명되었다. 이에 정부는 2026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다. 3·1운동 발발 107년 만에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참 잘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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