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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 약속 지키기 딱 좋은 시기, 바로 지금
김혜선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영상학 박사)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을 공식 지시했다. 문화기술(CT, Culture Technology)을 국가 전략기술로 지정하고, 기술과 예술·문화가 융합된 21세기형 통합 생태계를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정부는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과 연계해 1,200억 원 규모의 건립안을 마련했고, 해외 연구기관과의 협력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이 계획은 예비타당성조사도 거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후 각 정부는 CT를 국가과제로 재지정했지만, 독립적인 연구기관 설립 논의는 번번이 좌절됐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책 연구기관 구조조정 기조가 발목을 잡았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CT의 국가과제 지정만 있었을 뿐 실행 계획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광주 설립 의지를 표명했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은 부재했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CT 연구의 컨트롤타워는 단 한 번도 세워지지 못했다. 그나마 2013년 광주과학기술원 내에 ‘한국문화기술연구소’가 설립되어, 향후 연구원 설립을 위한 인큐베이팅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조직 운영과 구조상의 제약으로 본래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는 개별 기관의 한계라기보다, 국가 차원의 제도적 지원과 명확한 로드맵이 뒷받침되지 못한 구조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째, 정책 리더십의 부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단절되고, 국책사업을 지속할 의지와 역량이 사라졌다. 둘째, 부처 간 역할 조정 실패다. 과기정통부는 국가 R&D를, 문체부는 문화산업 진흥을 맡고 있지만, CT에 관한 명확한 주관 부처와 예산 구조는 없다. 셋째, 제도적 기반의 불명확성이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에는 연구기관 지정과 육성이 명시돼 있지만, 실제 운영 방식과 권한, 기능은 정해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 같은 제도적 공백이 단순 행정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저해한다는 데 있다.
현장에서는 CT를 공학 또는 예술 중 하나로만 분류해 평가한다. 기술적 이해 없이 예술로만, 혹은 문화적 맥락 없이 기술로만 판단하다 보니 융합형 인재와 혁신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어렵다. 결국 CT 고유의 강점인 ‘경계 없는 융합’이 평가와 제도에서 스스로 잘려 나가고 있는 셈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차이가 더욱 뚜렷하다. 프랑스 IRCAM은 예술과 공학을 결합한 연구기관으로, 국립음향음악연구소와 긴밀히 협력하며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받는다. 미국 MIT 미디어랩은 학제 간 융합을 기반으로, 예술·공학·디자인·인문학이 한 공간에서 혁신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장기 비전과 일관된 지원 체계다. 반면 한국의 CT 정책은 단기 사업 위주로 추진돼 정책 일관성이 부족하고, 장기적인 R&D 인프라 구축도 미진하다.
오늘날 문화기술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AI, 메타버스, 인터랙티브 미디어, 전통예술, 교육 등 거의 모든 문화·산업 영역에서 CT가 적용되고 있다. 문화기술은 ‘기술이냐, 문화냐’의 이분법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문화 정체성을 동시에 구축할 수 있는 전략 분야다. 예술과 공학, 인문과 데이터, 산업과 감성을 하나로 묶어내는 융합 생태계 설계와 지속가능한 R&D 체계가 필요하다.
20년 전, 우리는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약속은 실행되지 못한 채 미뤄져 왔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국이 문화기술 강국으로 도약할 것인지, 아니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것인지. 해답은 명확하다. 정책적 결단과 제도 개혁, 그리고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설립이다. 지금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