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여

이달의 칼럼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달의 칼럼 3월호] 

     

    전남방직에 세워졌던 국기 게양대 – 국내 몇 안 남은 문화유산


     

    김덕진(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장, 광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


     

     박영효가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가면서 태극도안의 기를 사용한 것이 우리나라 국기의 효시라고 한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후 전국 곳곳에 일장기를 게양하면서, 태극기 게양을 금지하였다. 태극기는 곧 주권을 의미하여 3⋅1운동 때 우리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 시위를 펼쳤다. 이후 일제는 일장기를 ‘국기’라고 하며 ‘국기 게양’을 강요하였고, 그 정책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강화되었다.

     

     일제는 일장기의 규격과 게양법을 개정⋅공포하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일장기의 규격과 게양법은 물론이고 기념일 날 일장기의 게양과 일장기에의 경례를 홍보하는 내용을 수록했다. 일장기를 게양할 기념일을 지정하여 홍보하였고, 행정기관과 관변단체를 통해 일장기를 보급하였다.

     

     이와 함께 곳곳에 ‘국기 게양대(國旗 揭揚臺)’를 세우게 하였다. 이는 일제의 ‘일장기 정책’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이었다. 모든 공공기관, 군부대, 학교, 종교단체, 신사, 산업시설, 사회시설, 마을, 광장 등이 대상이었다. 건립비는 대부분 기부나 갹출이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 학용품값까지 투입하였다. 위치는 건물 옥상이나 땅 높은 곳이었다. 광주공원 같은 산 정상에도 세웠다. 게양대 높이는 100척(300미터)에서 70⋅80척(20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현준호가 기증한 서석초등학교 것은 2층 건물보다 훨씬 높았다.

     

     고지대에 20미터 이상으로 서 있는 게양대에서 휘날리는 2×3미터 또는 3×4미터 크기의 대형 일장기를 통해 제국=‘천황’, 전쟁=동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당연히 게양대는 철제였다. 콘크리트 토대 위에 철골을 삼각형 형태로 조립해서 세웠다. 해방 이후 우리는 일장기 자리에 그대로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구 도청 앞 일본 헌병대 자리의 게양대는 1960년대 금남로 확장 공사 때까지, 수창초등학교 것도 60⋅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전방방직 노동자들도 공장에 ‘해방 1주년 기념’으로 20미터 정도의 국기 게양대를 세웠다. 공법과 모양은 일제 때 것 그대로이다. 현재 문을 닫은 일신방직 공장 안에 서 있다. 현재 이런 것은 국내에 몇 안 남았다. 전남⋅일신방직 부지개발을 놓고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국기 게양대도 공공성 확보의 대상으로 포함되어 역사교육의 유산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주소:(우)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3 (금남로3가) 삼호별관 2층 전화:062)234-2727 팩스:062)234-2728 이메일:r-cultural@hanmail.net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