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여
100년 뒤에도 광주극장을 보고 싶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광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극장은 1935년 충장로 5가 62번지에 개관된 광주극장이다. 1935년에 문을 열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89살이나 된다.
광주극장은 유은학원의 설립자이면서 만석꾼이던 최선진이 30만 엔(円)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개관한 극장이다. 이보다 앞서 (옛)런던 약국 사거리 근처 파레스 호텔 터에 일본인이 건립한 ‘광주좌(光州座인)’라는 극장이 있었지만, 조선인이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의 중심 상가에 건립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극장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 1,25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극장이었다.
당시 광주극장은 영화 관람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검열을 받으면서도 창극단이나 판소리 등을 극화한 공연을 주로 상영하면서 신문화운동과 함께 항일정신을 이어갔고, 1943년에는 전설의 춤꾼이었던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공연도 있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에는 조선건국준비원회 전남지부가 결성된 역사적 현장이었고, 김구의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극장이 무용공연 등 문화교육 운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니, 광주극장은 근 90년간 광주의 복합 문화가 생성되고 발현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전설의 복서로 유명한 순천 출신 서정권을 위한 환영회가 열리기도 했고(동아일보 1935년 10월 11일자), 이듬해인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영화를 무료 상영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6년 8월 18일자). 이때 몰려든 인파가 무려 1천 5백여 명이었다.
광주극장은 해방 후 한국 영화가 붐을 타면서 탄탄대로를 걷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1968년 1월, 화재가 발생하여 광주극장이 전소된다.
최선진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극장을 재건축하여 동년 10월 4일 재개관하였고, 재개관하면서 재개관 기념으로 김희갑 쇼 ‘팔도강산’을 공연하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멀티플렉스가 생겨나게 되면서 광주극장의 인기는 밀리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1년에는 광주광역시교육청으로부터 극장 폐쇄 명령을 받는다. 극장이 학교보건법상 유해시설이며, 15m 안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광주극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야 예술 영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 교육청은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극장주를 검찰에 고발했고, 극장 측도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이에 맞선다. 결국, 2004년 5월 27일, 헌재는 학교정화구역에서의 극장 영업을 금지한 학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고, 광주극장은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2년부터 예술영화지원사업을 통하여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면서 버텨왔지만, 2015년부터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이 “예술영화유통배급지원사업”으로 변경됨에 따라 지원금이 끊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영난에 봉착했음은 물론이다.
오늘 광주극장의 소유는 학교법인 유은학원 소유로 되어 있지만, 이미 광주극장은 광주 시민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확산되면서 광주인들의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던 광주극장을 지켜내기 위한 시민들의 후원이 모아지고 있다.
광주극장 관할인 동구청은 지난 2월 문화자원으로 선정하여 관의 지원 근거를 마련하였고, 고향사랑기부제라는 제도를 통해 ‘광주극장의 100년 극장 꿈을 응원해주세요’라는 모금함을 ‘위기브’ 사이트에 개설하여 시민들의 성금을 받고 있다. 천만다행이다. 100년 후에도 광주인들의 진한 사랑이 담겨진 광주극장을 보고 싶다.